[이전이야기 ] 유고 내전 속 안테 파벨리치 인종 청소 (크로아티아 괴뢰정권)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창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민족 갈등을 멈춘 인물은 요시프 브로즈티토였다. 이 사람은 오늘날까지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숭상하고 있는 인물로 크로아티아인 아버지와 슬로베니아 인 어머니를 둔 혼혈 민족 출신인데 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의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서 가게 되고 거기서 배운 것이 사회주의 이념이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고국으로 돌아온 후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하고 파르티잔=빨지산을 규합해 나치에 끝까지 저항을 했던 인물이다.
결국 1945년 독일의 패망과 함께 티토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적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창설하게 된다. 공화국내 이주를 장려하여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고, 단일국가를 꿈꿨던 티토였다. 티토는 각 민족의 역사 문화 종교를 고려해 6개 연방국가와 두 개의 자치주를 만들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모습이 이때 만들어진것이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사회주의 국가지만 티토의 정책은 자본주의 시스템도 도입을 하는 것이었다. 노동자 권익을 최대한 보호해서 생산량을 증대해서 경제를 부흥시키려 했고 소련과 미국 사이에서 독자적 양다리 외교를 펼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초고속 경제 성장을 이룬다. 이렇게 1980년 초까지 눈부신 성장을 한 유고슬라비아였고 유고연방은 동유럽권 사회주의 국가 중 부유한 나라로 급부상한다.
티토의 사망이후
그러나 1980년 5월 티토가 지병으로 사망한 후 유고슬라비아 연방 국민들은 큰 슬픔과 충격에 빠진다.
티토를 대신할 강력한 지도자가 없던 유고연방은 6개 공화국과 2개 자치구 대표 8명을 선출해 집단지도 체재를 구축했으나 서로 의견 충돌이 생기면서 연방 내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티토 사망 이후 실업률이 13% 약 2배가 증가하고 80년대 후반부터는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은행과 기업이 파산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심각한 경제 문제에 민족 간 갈등도 심화되었다.
밀로셰비치
연방이 혼란해 지자 다시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득세를 하기 시작한다. 그 중 세르비아인의 우수성을 외치면 등장한 인물 밀로셰비치였다. 그는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는 히틀러의 선동 방법과 같은 연설을 적극 활용한다.
연설 후 세르비아인들의 민족적 영웅이 된 밀로셰비치에 의해 티토가 세르비아인들의 이익을 빼앗고 역사의 희생자로 만들었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한다. 19990년 세르비아 중심의 유고 슬라비아 연방으로 재편을 추진하려했고 이에 연방 내 공화국의 반발이 일어난다. 결국 민족간의 갈등이 폭발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유고 연방 최초의 독립 국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축구경기에서 세르비아 극우 세력의 도발로 양측 관중은 충돌하게 되고 이때 경찰력을 잡고 있던 세르비아 경찰이 크로아티아인들만을 진압했고 그 모습에 크로아티아인들은 더욱 분노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가 같은 국가 안에서는 공존할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결국 1991년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는 독립선언을 한다.
독립을 선언하니 당시 유고연방군 장교의 70%가 세르비아인일 만큼 병력을 가지고 있던 세르비아는 슬로베니아를 먼저 공격했으나 이 전쟁은 열흘만에 슬로베니아의 승리로 끝이 난다. 당시 슬로베니아에는 88%가 슬로베니아인이었기 때문에 민족감정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고 국제 사회 여론 악화로 포기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슬로베니아는 유고 연방에서 가장 먼저 독립을 한 나라였다.
크로아티아 독립 과정
슬로베니아와 달리 크로아티아는 달랐다. 크로아티아 인구의 78%가 크로아티아인이지만 세르비아인도 약 12% 약 60만명이 살고 있었다. 크로아티아 의회는 세르비아인을 소수민족으로 규정하고 세르비아인 경찰과 공무원들을 강제로 퇴직시켜버렸다. 그러면서 세르비아인을 제외 국민 투표에서 94%가 독립을 지지했다.
밀로셰비치의 부코바르 인종 청소
세르비아 연방군은 철수하면서 바로 크로아티아로 이동했고 1991년 유고 연방군은 세르비아인 거주지역을 확보한다. 이곳을 거점으로 크로아티아의 땅 1/3을 차지한다. 세르비아 중심 유고 연방군과 민병대는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계획하고 부코바르라는 도시를 점령하면서부터 시작된다.
3개월간 3만 6천여명의 세르비아군의 공격으로 인해 부코바르는 폐허로 변하게 된다. 부코바르에 거주하던 약 2만여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은 강제 이주 된다. 그러나 마지막날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해 이 지역내에 있던 병원 환자였던 260여명을 농장창고로 끌고가서 집단 폭행 후 총살해버린 것이다. 이들 중에는 16살 ~70대 노인 심지어 임산부까지 있었다.
크로아티아 민병대는 당시 무기와 병력이 부족했고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했던 구식 소총이었고 부족한 무기를 여러 방법으로 구하다 보니 무기가 제각각이었다. 이렇게 크로아티아는 힘겨운 전쟁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어느날 크로아티아 전쟁의 판도를 뒤집은 사건이 일어난다.
두브로브니크 폭격
세르비아 중심의 유고 연방군은 찬란했던 중세의 도시였던 두브로브니크를 공중 폭격한다. 약 7개월간 포위하면서 주요 시설과 가정집 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을까지 폭격하면서 1/3의 문화유산이 파괴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아름다웠던 이 도시는 모든 것이 무너지고 폐허가 되어버렸다. 2차 세계 대전때보다 더 심각한 피해 상황이었다. 게다가 수많은 인명 피해까지 발생하게 된다.
국제여론 형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인 두브로브니크가 파괴된 모습이 국제여론을 바꿔버렸다. 당시 유럽공동체 EC(현재 EU)에서도 이 문제를 주의 깊게 지겨보고 1992년 1월 15일 만장일치로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승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3년간 간헐적 전쟁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군의 우세로 전쟁은 마무리된다. 결국 세르비아인들은 떠나고 유고 연방군과의 전쟁을 통해 1995년 크로아티아 독립 쟁취에 성공한다. 길었던 5 년간의 전쟁으로 양측 합쳐서 약 2 만명의 사망자와 각각 3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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